미국으로 이동후 유태인 단체를 설립하여 위상강화
미국으로 이동후 유태인 단체를 설립하여 위상강화
  • 심영섭 편집인
  • 승인 2010.02.13 22: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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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 이야기 (20) … 유럽 유태인들의 대 이동

▲ 치학신문 심영섭 편집인
[덴탈투데이/치학신문] 서유럽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고조되어가고 있는 현지인들의 반유태주의와 또한 동구인들에게는 절대빈곤을 피하기 위하여 대서양을 건너게 된다.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200만 명 이상이 미국으로 이주 했다. 이는 시기별로 특징을 갖고 있었다.

첫 번째 이주는 독일 유태인들 이었다. 이들은 금융업과 백화점 업으로 진출 했다.

두 번째는 동구출신 유태인들, 1870년부터 1924년까지 러시아 제국(폴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포함), 루마니아, 그리고 헝가리로부터, 계속되는 대량 학살과 빈곤을 못 견뎌 2백여만 명 이상이 미국으로 떠난다. 이들은 수공업, 숙련공, 소상인 그리고 가게 점원들로 오늘날 미국유태인들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세 번째는 중부유럽의 유태인들, 1925년부터 1943년 사이 25만명, 2차 대전 이후 1953년까지 20여만 명이 미국으로 이주 했다. 이들 중에는 핵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고급두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뉴욕에 상륙하여 그곳에 자리 잡았다. 8만 명이던 뉴욕 유태인들은 1915년 14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뉴욕에서도 맨해턴 섬의 몇몇 지역에 밀집하여 정착 했으므로 주거환경이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처음 직공으로 시작한 노동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관리자가 되고 또 사장도 되어 미국의 봉제업을 휘어잡게 된다. 또 러시아 출신 노동자들은 미국 봉제 노동조합 결성의 틀을 만들었다. 1900년 국제여성봉제노동조합을 필두로 노조가 결성 되면서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도 일어났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결코 노동자 계급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자녀교육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그들이 좀 더 나은 직종에 종사하기를 원했다. 그 결과 1900년 초 미국태생 러시아계 유태인 중에는 변호사와 회계사가 된 사람이 기성세대 보다 6~7배나 더 많았다.

유태인부모들은 자식들이 변호사, 회계사, 의사, 치과의사와 같은 자유직업에 진출하기를 더 바랐다. 1940년대에 이미 뉴욕전체 의사, 치과의사, 법률가의 60% 이상을 유태인이 장악하게 된다.

◆ 미국 유태인 단체 Big Three

미국 유태인 사회는 20세기 초부터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기 시작한다. 19세기 중반 경 미국으로 이주했던 독일계 유태인 수가 수십만 명에 불과 했지만 러시아 유태인 약 150만 명이 진입하면서 조직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기존의 독일 유태인과 뒤늦게 도착한 러시아 유태인은 서로 협력적인 관계가 아니고 오히려 경쟁적인 관계에서 조직을 이끌었다.

러시아 유태인들의 상이한 언어와 가난은 이미 미국 시민자격으로 살고 있는 독일계 유태인들에게 부담을 느끼게 했다. 커뮤니티 내부의 이와 같은 부조화나 갈등에도 불구하고 외부와의 싸움에서는 단결력을 보여 주었다.

러시아 유태인들의 대량이민 이후 생겨 난 가장 대표적인 정치조직은 유태인 권익보호단체 Big three이다. 그것은 미국 유태인 위원회(AJC), 미국유태인의회(AJC), 그리고 유태인비방대응기구(ADL)등이다.

미국유태인위원회(AJC)는 러시아 짜르체제의 묵인 하에 1903년부터 1905년까지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유태인학살 및 약탈대응의 일환으로 명망 높은 독일유태인 지도자들에 의해 1906년 결성 되었다. 설립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과 유럽각지의 정부로부터 미국유태인을 보호하는 기관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 조직의 주요 공적으로는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설립을 인정하는 영국정부의 1917년 선언유도와 같은 시오니즘 지원, 유태국가 재건준비를 담당하고 있던 유태인 에이전씨와의 협력, 1947년 UN의 팔레스타인 분할 안 지지 등을 들 수 있다.

미국유태인의회(AJCongress)는 소수 엘리트들이 운영하는 미국유태인위원회(AJCommittee)에 대한 일반 유태인들의 반발에 의해 생겨났다.

당시 유태인 최고 지도자인 브란데이스 변호사와 랍비 와이즈가 1955년 미국유태인위원회의 대체조직으로 AJCongress를 결성하여 1916년 필라델피아에서 33개 전국 대표그룹들과 함께 사전 총회를 열었다. 미유태인의회(AJCongress)는 유태인 권익단체 중에서 시오니즘이 가장 강한 단체였다.

유태인비방대응기구(Antidefamination League ADL)는 20세기초 미국사회에 만연해 있는 반유태주의에 대항하면서 설립된 조직이다. 1908년 독일태생 법률가 리빙스턴에 의해 시작 되었다. 활동은 유태인도 일반 미국인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역할로 출발했다. 편지쓰기에서부터 팸플릿 및 신문광고로 발전해 간다.

1930년대 ADL은 조직적인 대중운동이 되었고 반 유태인그룹들에 대한 정보수집활동이 필요했다. 그래서 때로는 탐정요원을 고용하기도 했다. 수집된 정보는 FBI나 언론에 넘겨졌다. 반유태주의자들은 ADL을 경멸하면서 무서워하고 있다.

유태인들의 생명과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미국 유태인들의 노력은 조직이 결성되기 전에도 존재 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러시아에서의 유태인 학살 고발조치였다. 뉴욕의 부유한 유태인들은 1892년 뉴욕타임즈(당시는 비 유태인 소유)를 움직여 그들의 비용부담으로 짜르체제의 잔학상을 취재토록 특파원을 러시아로 파견시켜 러시아의 반 유태실상에 관한 특집기사로 미국에서 전국적으로 분노를 자아내게 하였다.

러시아에 대한 미국 유태인들의 보복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나타난다. 뉴욕의 투자은행가인 야콥쉬프는 자청하여 국제금융시장에서 전비 조달자금을 찾고 있던 이본의 전쟁펀드 발행을 보증하고 나섰다. 일본은 그 자금으로 신형무기와 군수물자를 구입해서 러시아에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쉬프는 일본천황으로부터 작위를 받았다.

1911년에는 AJCongress가 최초의 강경한 유태인 시위를 주도하여 상원으로 하여금 1832년 체결되었던 미-러 통상조약을 폐기토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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