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과의 이별, 그리고 새로운 만남
“녀석”과의 이별, 그리고 새로운 만남
  • 박정빈
  • 승인 2010.11.01 1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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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습실 리모델링을 즈음하여 -

 

본과2학년. 실습, 실습, 또 실습. 폭풍처럼 실습이 몰아치는 시기다.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자정이 지나서까지 실습실에 앉아 핸드피스를 돌리다 보면 점점 미쳐가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가만히 누워 있는 팬텀을 향해 말을 건다나 하는 그런 종류 말이다. 종종 멍청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녀석“을 마주 대하고 있다 보면 입을 찢어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은 나뿐만이 아닐 거라 믿는다.
 

한편, 우리가 늘 사용해야 하는 실습실 장비가 고가이긴 하지만, 낡을 대로 낡아있었다. 석션은 그냥 폼일 뿐이고, 툭하면 핸드피스의 물이 안 나온다거나, 버가 지그재그로 돌거나 하는 일이 허다했다. 거기다 수리비도 비싸서 매번 업체에다 맡기질 못하고, 맥가이버 아저씨(사무팀 정재영 기사님을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께서 직접 핸드피스를 분해해 수리하곤 했다. 그렇게 여러 가지로 우리를 고생시키던 실습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리모델링 소식을 들었다. 동문들의 힘으로 자그마치 20억이라는 큰돈을 들여서 이뤄지는 대공사라고 한다. ‘아이고, 이제 실습시간 중에 핸드피스 수리해달라고 뛰어다닐 일은 없겠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후배들은 좋겠다, 우린 벌써 2학기나 꼬질꼬질한 실습실을 썼는데..‘ 라며 손해 보는 듯한(?) 마음도 들었다. 어쨌든 후련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1학기 마지막 실습이 있던 날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마지막” 이라는 단어는 사람을 참 묘하게 만든다. 그렇게 지긋지긋하던 실습실에 한동안 올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한 번 더 뒤를 돌아보게 된다. 더구나 2학기에 다시 학교를 와보면 이렇게 생긴 실습실과 이렇게 생긴 팬텀은 다시 만날 수 없을 테니까. 멍하니 앉아서 한참을 있다 보니 시끄럽게 돌아가던 엔진 소리가 멎고, 정적이 흐른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들 떠나고 옆자리 정우형만이 남아 있다. 이 형, 나처럼 감상에 빠진 듯한 표정이다. 팬텀을 정리해 밀어 넣을 생각도 않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매일 옆자리에 앉아 덴쳐버를 돌리다 보면 표정만 보고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갈 때가 있다. ‘이대로 녀석을 보낼 수는 없다.’ 뭔가 복수를 해야 한다. 씩 웃던 이 형, 그대로 목을 꺾어 팬텀의 숨통을 끊어 놓는다. 그리고는 미안 했는지 반질반질한 팬텀 뒤통수에 입을 맞춘다. “에이~ 약하다. 라는 한마디를 듣자마자 곧바로 딥키스 자세를 취해준다. 그렇게 정열적인 우리들만의 작별인사가 끝이 났다.

2009년 11월 6일. 그를 처음 만난 날이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보내며 “내 첫 환자”라고 자랑스럽게 부모님께 소개해 드렸다. 그때 어머니의 답장은 “아픈거 잘~ 참게 생겼네, 너무 괴롭히지 말고 치료 잘해드려라”라는 것이었다. 물론이다. 그 녀석이 나를 좀 괴롭혔을 뿐.
이제 날 괴롭히던 그 녀석은. 내 첫 환자는 이 세상에 없다. 정말 입을 찢어버리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내 생애 첫 환자였다. 세 시간, 네 시간씩을 입을 벌리고 있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내 환자였다. 구치부가 보이질 않는다고 고무로 된 피부를 벗겨내 앙상한 뼈만 보일 때에도 그는 묵묵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2학기가 되어 학교에 다시 와 보니, 번쩍번쩍 거리는 새 실습실이 완성되어 있었다. 자리마다 시커먼 모니터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었고, 책상도 무슨 처리를 해서 칼질을 해도 된단다. 뭐 이것저것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역시 “녀석”이 다른 “녀석”으로 바뀌어 있다는 것이다. 우린 또 금방 적응할 것이다. 예전보다 좋은 시설에서, 좋은 환경에서 “녀석”과 지긋지긋한 우정을 쌓아 나갈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치과의사가 되어갈 것이다. 하지만 “내 첫 환자”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설렘과 흥분을 잊지 않으려 한다.

▲개관식 테이프 커팅식

새로운 실습실이 열린지 1달 하고도 보름이 지났다. 그 동안에도 실습은 꾸준히 이어졌고, 여전히 우리는 밤늦게 까지 덴쳐버를 돌리고 있다. 새 시설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강의실 책상보다 더 편한 곳이 되어가고 있다. 이쯤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좋아졌고, 어떤 점에서 개선이 필요한지 알아보겠다.

3층 기공실습실에는 모든 좌석에 모니터가 설치되었다. 강화유리로 된 Shield Glass와 함께, Arm Rest가 추가되었다. 책상 앞부분은 석조로 강화되어 기스가 나는 것을 예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또한 반 이상 고장 났던 기공용 핸드피스가 교체되었는데, 거치대가 함께 제공되어 패달을 잘못 밟아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 한다. 거기에다 매번 석고 가루를 날리며 기공을 하던 예전과는 달리 석션 시스템(?)이 바뀌며 편하게 실습이 가능해졌다.

▲3층 기공 실습실
개인적으로 Shield Glass가 추가된 점이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아직은 다들 손이 서툴러 곧잘 기공물을 놓치는 실수를 하기에, 보철 실습 때는 눈을 보호하기 위한 고글을 끼고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그 착용감이 답답해서 눈치를 보며 벗어 놓기가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날, 고정성 보철학 실습 시간에 Sprue를 떼어 내려다 디스크가 부러져 튀어 나간 적이 있었다. 그 중 한 조각이 내 눈 쪽으로 정확히 날아왔지만, 다행히도 유리판에 맞아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 뭐 애초에 잘 돌아가지도 않는 옛날 핸드피스였다면 부러질 일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2층 실습실 전경

2층 임상전단계 실습실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3층과 같이 전 좌석에 모니터가 부착되어 있었으며, 교수님 테이블에 놓여 있는 카메라를 통해 데모를 바로 그 모니터로 볼 수가 있었다.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매번 실습시간 마다 데모를 보기 위해 20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빽빽이 교수님 곁에 모여서서 고개를 기웃거리던 시절은 이제 지난 얘기가 되어버렸다. 팬텀 역시 잘 생긴 새 모델로 교체되어 있었다.

일본친구였던 과거와 달리 이젠 쌍꺼풀이 짙고 코가 높이 서 있는 독일친구이다. 입 안에 물 배출구가 없어 주기적으로 석션을 해 주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굉장히 깔끔한 모습의 팬텀이었다. 게다가 교합이 불가능한 기존 팬텀과는 달리 폐구로를 조정하여 팬텀상에서 교합도 확인해 볼 수 있다. 3-way Syringe와 고성능 석션, sliva ejector 두가지 팁으로 교체 가능한 석션도 훌륭했다. 아직은 구현되지 않았지만, 조만간 전 좌석에 컴퓨터가 비치될 예정이고, 헤드셋을 이용한 교수님과의 양방향 통신도 가능할 것이라고 한다. 또한 모든 좌석마다 High/Low speed Angle이 한 쌍 씩 비치되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던 과거와는 달리, 따로 수납장을 마련해 체계적으로 관리 된다.
한 달간 사용해본 개인적인 소감을 말하자면, “지금 까지 내가 못한 게 아니라 기계가 구린거였다” 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그렇게 믿고 싶다). 하이스피드로 모형치아를 프렙하다 보면 버 끝의 날이 망가져 못쓰게 되거나, 치아가 새카맣게 타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난 정말 내가 못하는 건줄 알았다. “실제로 환자 볼 때 이렇게 태워 먹어버리면 치료고 뭐고 소송 걸리겠지?” 라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알고 보니 그 이유는 단순했는데, 하이스피드 끝에서 물이 제대로 안 나오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럴 걱정은 없다. 네 방향에서 시원~하게 물이 뿜어져 나온다. 다만 걱정은 미러뷰로 상악을 프렙할 때 미러에 물이 더 많이 튄다는 것. 하지만 바뀐 석션팁을 잘 위치시키면 된다. 놀라웠다. 그리고 두려웠다. 이제 변명거리가 없어진 것이다.

▲ Prep Assistant
후배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한 가지가 더 있다. 아직은 구현되지 않았지만, 조만간 구현될 예정일 Prep Assistant 라는 기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름은 정말 선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Assistant라니. “뭐 옆에서 도와주는 건가?“ 라고 생각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 기계는 치아 모형을 3차원으로 스캐닝 해서 컴퓨터로 보여 주고, 또 Prep 정확도를 수치화 시켜서 보여주는 기계이다. 이젠 채점 받기 직전에 Prep 바닥에 콧기름을 살짝 바르는 등의 눈속임은 통하지 않는다.

굉장한 장비들을 갖추었지만, 사용하다 보니 몇 가지 불편한 점도 눈에 보였다. 우선 장비 크기가 크다 보니 통로가 좁아졌다. 또한 팬텀에 석션 거치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Assist 없이 혼자 실습을 하려면 미러, 핸드피스, 석션 까지 손이 3개가 필요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는 약간의 개선이 필요해 보이는데, 조만간 개인적으로 철물점에서 두꺼운 철사를 사서 거치대를 만들어 보려 한다. 이런 사소한 불편한 점은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제 동문 선배님들 덕분에 최고의 환경에서 실습을 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정한 고수는 무기 탓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좋은 칼이 있다면 고수가 되려 수련하는 길이 조금은 쉬워지지 않을까? 이제 우리는 좋은 칼은 갖추었으니, 고수가 되는 일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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